❏ 문간공(文簡公) 이서와 정릉(貞陵)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 의 둘째 부인은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1396)로 전해진다.
이성계에게는 정실부인이자,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1391)가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선 건국 1년 전 1391년에 (韓)한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는 덕수궁 뒤에, 한양 도성 안에 강씨 왕비의 무덤 정릉(貞陵)을 조성하게 되었다.
신덕왕후가 1396년 9월에 마흔 살로 숨지자, 태조는 몹시 슬퍼하며,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에 묻고, 정릉(貞陵)이라고 명명, 지금 중구 정동 영국 대사관 근처에 아내를 묻었다. 현재 덕수궁 근처를 정동(貞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강(康)씨 사후(死後) 존호와 능호를 각각 신덕(神德)과 정릉(貞陵)으로 정했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해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수릉직을 맡게 했다.
정릉(貞陵) 무덤을 조성하는 총 책임자인 문간공께서는 3년 동안 정릉을 조성하고 정릉을 지키었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가 1970년대 소실된 서울 정릉(貞陵)의 재실(齋室)을 복원한다고 밝혔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이번에 복원되는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영(令)과 참봉(參奉) 등이 쓰던 건물이다.
이에 따라 발굴조사 결과와 고증자료, 관계전문가 자문,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복원 설계를 완료하고, 공사비 15억 원을 투입해 9월부터 내년 10월까지 재실, 문간채, 제기고 등 건물과 담장, 석축을 복원한다. 그리고 복원된 재실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 청계천 광교(광통교)
종로에서 을지로로 나가면서 만나는 청계천 길목에 놓여진 다리로 지금은 차량이 지나는 새로운 다리가 놓여있지만 원래의 광통교는 상류방향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었으며,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 또는 큰광통교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으며,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놓았으며, 태종 10년(1410) 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다.
이후 1760년 경진준천을 한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에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전차 가설, 1910년 전차선로를 복선화 등으로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난간만 창경궁, 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는 다시 몯혔었는데 2005년 청계천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 문간공께서는 3년 동안 조성 석물
청계천 광교(광통교) 석물(石物) 돌은 문간공 이서 할아버지가 생존 시에 1396년 8월(음)에 직접 감독하여 조성하여 만든 정릉(貞陵)에 있었던 석물이었으므로, 혹시 청계천에 광교를 지날 때면 문간공 할아버지를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1367~1422)은 1409년 2월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신하들에게 덕수궁 뒤 한양 도성 안에 있는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을 도성 바깥 양주 <사을한록, 沙乙閑麓>산기슭으로 옮기고 무덤이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때 신덕왕후의 무덤이 옮겨간 곳이 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이다.
이방원은 원래의 정릉에 있던 석물 중 일부를 청계천 광교(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했다. 성스러운 물건으로 인식되던 정릉의 석물을 광통교의 일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정도로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철저히 짓밟으려 했다. 작은 엄마 신덕왕후가 죽은 뒤로 13년이 지난 뒤에도 이렇게 행동한 것을 보면,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로 인해 정릉은 왕비능이 아니라 후궁 무덤으로 격하되었다. '능'이 아닌 '묘'로 떨어진 것이다. 참고로, 왕족의 무덤은 능-원-묘의 3단계로 구분된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太祖 7년, 1398년 8월 13일(음)
以李舒爲參贊門下府事, 姜仁富爲商議中樞院事, 旌表其居曰忠臣之閭, 賜鞍馬衣笠金帶。 初舒及仁富守后陵, 服喪三年。
이서(李舒)를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삼고, 강인부(姜仁富)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삼고서, 그 거처를 정표(旌表)하여 충신(忠臣)의 여(閭)라 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갓·금대(金帶)를 내려 주었다. 처음에 이서와 강인부가 왕후(王后:신덕)의 능(貞陵)을 지키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었었다.
문간공께서 1398년 8월 13일 충신(忠臣)의 <정려>, 문간공께서 한양에 사셨던 홍문서동 집에 표시를 해준 <정표>를 하사 받음. <旌表其居曰忠臣之閭, 정표기거일충신지려>
문간공께서 1398년에 하사(下賜) 받은 <정려>가 나중에 홍주 홍성으로 이전하여 이건(移建)하여져서 세워졌고 다시 홍성에서도 몇 차례 이건하였고 현재 장곡면 지정리에 위치하여 보존되고 있다.
*. 參贊門下府事(참찬문하부사) : 정2품 벼슬. 1401년 태종2년에 <참찬의정부사>로 관직 개명됨.